2011년 10월 25일 화요일

“탈진(Burn-out)-너무 겁낼 것 없다(?)” (10/23)

가정교회 세 가지 축이 있습니다. 첫째는 은혜로운 목장연합예배(주일예배)이고, 둘째는 삶 공부, 그리고 셋째는 매주 모이는 목장모임입니다. 이중에 어느 것 하나 소홀히 여겨질 수 있는 것이 없습니다. 단지, 세 가지 중에 개척가정교회에서 우선적인 집중사역이 뭐냐고 묻는다면 “목장사역”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왜냐하면 개척가정교회 시작이 원형목장 하나인데 교회에 모일 수 있는 교인이 그리 많지 않고, 삶공부 참여도도 낮기 때문입니다. 경험적으로 목장사역은 개척가정교회 사역에 기반이 되고, 목장사역이 든든해져 가면서 개척가정교회는 서서히 자리를 잡아가는 것 같습니다. 그만큼 목장사역은 개척가정교회가 세워져 가는데 큰 디딤돌 역할이 됨을 경험해 왔습니다. 개척가정교회 뿐만 아니라 가정교회로 전환해서 사역해 가는 기존교회도 마찬가지라고 봅니다. 목장사역이 든든해 가면 가정교회가 힘을 얻어가지만, 목장사역이 약해지면 가정교회로 전환한 교회라 할지라도 그 사역의 기본적인 틀이 무너져갈 수 있습니다. 개척가정교회가 세워지느냐? 가정교회로 전환한 교회의 가정교회 틀이 무너져 가느냐?는 목장사역에 달려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문제는 그 목장사역을 감당하고 계신 목자목녀들과 목원들의 상태입니다. 그래서 그런지 가정교회 사역하시는 목회자들이 모이면 나눔의 주제가 “목자목녀들의 탈진”입니다. 개인적으로 개척가정교회로 원형목장을 경험한 저로서는 충분히 이해하고 공감합니다. 일반(기존)교회 사역을 넘어서는 희생과 헌신이 없이는 감당할 수 없는 사역이 목장사역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가정교회에서 사역하시는 목자목녀들이 존경스럽고 자랑스러운 이유입니다. 그만한 희생과 헌신이 있기에 가정교회사역에서 수 많은 영혼들의 열매가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영혼구원을 위해 끊임없는 섬김을 감당하는 목자목녀들을 축복해 주실 것이라 믿어 의심하지 않습니다.

한 가지, 개척가정교회 경험자로서, 그리고 주바라기 공동체 목회자로서 솔직하고 싶고, 숨기고 싶지 않은 속내가 있습니다. 왜 목회자들은 목자목녀들의 탈진을 두려워하는가?입니다. 목자목녀들의 탈진으로 이분들의 영적인 상태를 염려하는 것인가? 아니면 교회와 목회자체가 잘 되지 않을 것이란 두려움인가? 하는 문제입니다. 목자목녀들의 탈진은 현실입니다. 외면할 수 없는 이분들의 실질적인 영적 상태입니다. 교회와 목회사역을 위해 그 모든 부담과 지침과 탈진을 하나님의 사역이라는 미명하에 그냥 묻고 가야하느냐는 것입니다. 목자와 목녀들도 사람이고, 얼마든지 지칠 수 있고, 탈진할 수 있다고 봅니다. 부목회자로서 사역해 오면서 늘 가슴에 안고 있었던 아픔이 교회 건축을 위해서 수십명의 교인들이 상처를 안고 떠나가는 모습을 보는 것이었습니다. 사역이 사람을 우선할 수 없다는 것이 지금까지 포기할 수 없는 목회신념입니다. 사역하다보면 목회자도 탈진하는 경우가 있는데 평신도도 예외는 아니라고 봅니다. 자신의 능력보다 더 많은 일을 하다보면 누구에게든 올 수 있는 현상입니다. 탈진.. 너무 겁낼 것이 아니라 자연스럽게 받아주는 것입니다. 아무리 하나님을 위하고, 교회사역일지라도 사람을 우선해서 해결해 가야 한다고 믿습니다. 왜냐하면 교회 사역이 잘 안 된다 할지라도 이 순간에 주님의 가장 큰 관심은 사역이 아니라 그 개인의 영혼이라고 믿습니다. 이 문제가 충분히 배려되지 않기 때문에, 많은 경우 목자사역을 내려놓으면 목자들이 교회를 떠나는 이유라고 봅니다. 지금까지도 그렇게 사역해 왔다고 보지만, 앞으로도 누군가가 힘든 상황이 오면 교회 사역이전에 당사자의 마음이 회복되도록 조치할 것입니다.

그러나 가장 좋은 것은 이런 탈진현상 없이 행복함으로 사역해 가는 것입니다. 물론, 쉽지는 않지만 안된다고 보지도 않습니다. 세 가지 팁(Tip)이 있습니다. 하나는 성공과 실패에 대한 세상적인 관점을 버리고 사역하면 됩니다. 세상적인 관점은 눈에 보이는 것이지만, 하나님은 맡은 사역에 충성하는 사람을 보신다는 것입니다. 둘째는 영혼구원에 대한 간절한 소원함을 가지고 사역하시기 바랍니다. 아무리 노력해도 붙지 않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데 자연스럽게 맺히는 열매들이 있습니다. 그 맛이 꿀맛입니다. 마지막으로 행복하고 감사하며 사역하시기 바랍니다. 잘되어서가 아니라 잘 되지 않을 때 더 많이 행복해 하시고,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2011년 10월 19일 수요일

“저는 이런 면이 부족합니다” (10/16)

   지난주 총목자모임에서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다가 천목사님이 어떤 지적사항이나, 혹은 시정을 요구할 때 표현력이 좀 부족하다는 뉘앙스(인상)를 받았습니다. 약간 개인적으로 내심 충격적이긴 했습니다. 왜냐하면 저는 전혀 그렇지 않다고 생각해 왔기 때문입니다. 좀 더 자세히 설명하면 교회사역 중에 교정했으면 해서 지적하는 경우, 상대방이 좀 기분 언짢게 듣게끔 어투나 표현력, 억양. 등이 표현되나 봅니다. 이 글을 읽으시면서 “아.. 맞아” 하시는 분들도 있을 것 같기는 합니다. 솔직히 때로 제가 아무 의미 없이 말했는데 아내가 괜히 삐쳐있는 것을 보면 바로 이런 것이 아닌가 싶기는 합니다. 성격적으로 남에게 싫은 소리 못하는 성격이기 때문에 그것을 억지로 표현하다보면 어색함에서 나타나는 현상이 아닌가? 제 나름대로 좋게 해석해 봅니다. 이런 내용을 목회칼럼에 쓰는 이유는 앞으로 혹시 이런 부족함이 있더라도 오해하지 않았으면 해서 저의 부족한 부분을 알려드리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제가 그러니까.. 그렇게 알라”고 선전포고(?)하는 것은 아닙니다. 저도 나름 그렇게 하지 않도록 노력할 것입니다. 몰랐으면 모를까 이제 알았기 때문에 대화하면서 “주의” 하도록 하겠습니다. 목회자도 잘못 했다면 “지적”(?) 받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교회사역하다보면 지적해야 하는 일들이 종종 있기는 합니다. 웬만해서 그런 지적을 하고픈 마음은 없는데 교회 공동체를 위해서 어쩔 수 없이 총대(?)를 매야하는 경우가 발생합니다. 목회차원에서 지적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어떤 경우냐면, 첫째는 본인 개인에게 뿐만 아니라 교회 전체적으로 피해를 입을 수 있다고 생각되어질 경우입니다. 목회자는 교회 공동체를 지켜가야 할 책임이 있기 때문입니다. 둘째는, 그런 행동을 계속할 경우 공동체 식구들이 상처를 입게 되겠다 싶을 경우입니다. 상처를 받게 되면 교회를 멀리하게 되고, 결국 교회 공동체를 떠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엄청난 희생과 섬김으로 맺어온 영혼이 어떤 한 개인으로 인해 상처를 입어 교회 공동체를 떠난다는 것은 너무도 슬픈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 외 대부분의 경우는 그 동안 교회생활이 어떤 것인지 잘 배우지 못하거나 경험이 없어서 벌어지는 경우들입니다. 이럴 경우 교회생활과 신앙생활을 바로 해보자는 차원에서 약간의 제안이나 지적(?)을 하는 경우가 있다고 봅니다. 그러나 어느 경우들이 발생하더라도 특정인에 대한 미움이나 개인적인 섭섭함에서 말하는 경우는 전혀 없다는 것만큼은 믿어주셨으면 합니다.

   개인적으로는 정말 말하지 않았으면 좋겠는데 목회차원에서 말해야 하는 경우로 인해 서투른 언변이 있더라도 제 성격적인 차원으로 이해해 주셨으면 합니다. 남에게 싫은 소리나 지적하지 못하는 제 성격이 있지만 나름 노력하고 또 노력해서 잘 표현해 보도록 할 테니 자연스럽게 받아주셨으면 합니다. 물론, 이런 경우들이 그리 많이 발생되지는 않습니다. 제 경험상 10년에 한, 두 번 정도 있을까 말까 할 정도로 그리 흔한 일은 아니라고 봅니다. 문제는 이런 경우 외에 사역 중에 이런 저런 돌발변수가 있을 수 있습니다. 사역은 진행되어져야 하고, 때로 진행이 잘 되지 않아 이리 저리 뛰면서 아무 생각 없이 한 곳에 집중하다가 생각 없이 나오는 말들이 상대방을 언짢게 할 수 있습니다. 변명할 마음은 없습니다. 제가 이런 면이 많이 부족합니다. 주바라기 식구들이 그 동안 많이 이해해 주셔서 부족하지만 여기까지 잘 사역해 왔다고 믿습니다. 앞으로도 저의 부족함을 지적해 주셔서 보다 나은 목회자가 되도록 해 주십시오.

2011년 10월 12일 수요일

추수감사주일은 어떻게 시작되었을까요?(10/9)

성경에 나타난 최초의 추수감사는 가인과 아벨의 제사(창세기 4:3∼4)일 것입니다. 구체적으로는 이스라엘 민족이 지키던 세 절기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유월절, 오순절, 그리고 수장절이 그것입니다(출 23:14∼16). 유월절은 이스라엘이 출애굽 한 것을 기념하는 절기이며, 오순절은 맥추절, 칠칠절이라고도 불리는데 첫 수확을 기념하는 절기입니다. 초막절이라고도 불리는 수장절이 수확에 대해 감사하는 추수감사절의 유래로 볼 수 있습니다. “너희는 밭에서 애써 가꾼 것을 거두어들이는 한 해의 끝무렵에 수장적을 지켜야 한다”(출 23:16). 이스라엘 민족은 이 절기를 기쁨으로 지켜왔으며 감사의 제사를 하나님께 드렸습니다.

추수감사절이 오늘날의 모습을 갖추게 된 것은 영국에서 미국으로 건너간 청교도들에서 비롯되었습니다.경건한 삶을 추구하던 청교도 102명은 영국에서의 박해를 피해 1620년 메이플라워호에 올라 60여일의 항해 끝에 동년 11월20일 신대륙 플리머스항에 상륙했습니다. 그해 겨울 많은 사람들이 죽었지만 인디언들의 도움으로 생존자들은 이듬해 가을 곡식을 수확할 수 있었습니다. 이에 청교도들은 인디언들을 초대해 추수한 곡식과 채소, 과일 등을 놓고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고 음식을 나눠먹었습니다. 이것이 최초의 추수감사절입니다. 미국의 초대 대통령 워싱턴은 1789년 헌법 제정을 축하하면서 그해 11월26일 목요일을 추수감사절로 선포했습니다. 하지만 3대 대통령인 제퍼슨은 추수감사절이 영국의 관습이라는 이유로 폐지했고, 추수감사절이 다시 지켜지게 된 것은 훗날 링컨 대통령에 의해서입니다. 링컨은 남북전쟁의 조기 종결과 국민의 단결을 위해 11월 마지막 목요일을 감사일로 공식 발표했습니다. 그 후 루즈벨트 대통령은 1939년 감사절을 11월 셋째 주 목요일로 변경하게 되었습니다. 한국에서는 1908년 장로교 독노회에서 미국식 감사절을 그대로 지킬 것을 결의했습니다. 1914년 각 교파 선교부의 회의 결과에 따라 언더우드와 아펜젤러 선교사가 조선에 입국한 것을 기념하는 뜻에서 11월 셋째주 수요일로 감사일이 개정되었고, 이후 1921년 9월10일 평양에서 열린 장로교 총회 등을 통해 11월 셋째 주일로 변경돼 오늘날까지 지켜지고 있습니다.

한 가지, 추수감사절기에 대한 유감은 북미에 정착한 청교도들의 후예는 미국 땅에서 첫 번째의 수확을 감사하여 인디언 원주민들을 초청하여 추수감사절을 지켰듯이 추수감사절이 추수시기에 맞춰 정해졌다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본다면 우리나라의 추수감사 명절인 추석에 맞춰 추수감사주일을 지키는 것이 옳다고 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지키지 못하는 한국교회 현실이 있기는 합니다. 현실적으로 추석에 맞춰 추수감사주일을 지키자니 민족 명절 추석에 민족대이동이 시작되고 온 국민이 고향으로, 고향으로 부모님을 찾아 떠나기에 정작 섬기는 본 교회에서 추수감사주일을 지키지 못해서 미국식 추수감사주일을 따르고 있다고 봅니다. 다행이 캐나다 추수감사주일은 캐나다 국경일이기도 하고 추수시기인 Thanksgiving Day에 맞춰서 감사주일을 지키고 있다는 것입니다. 11월에 감사절기를 지키는 미국과 다른 것은 캐나다가 미국보다 추운 지방이므로 추수가 미국보다 빨리 끝나기 때문에 10월에 추수감사절을 지키고 있는 것입니다. 어째든 캐나다 추수감사절이 추수의 시기에 맞춰 정해져 있다는 것이 의미가 있습니다. 감사하는 삶은 하나님의 뜻이요, 감사하는 마음은 하나님이 사람에게 주신 근본 마음입니다. 추수감사절의 성경적 의미는 감사의 대상이 전능하신 창조주 하나님이 되는 데에 있는 것입니다. 

2011년 10월 6일 목요일

추수감사주일을 맞이하며.. (10/2)

다음 주일은 추수감사주일로 지킵니다. 매주 감사헌금으로 우리의 삶에 함께 하시는 주님께 감사의 제목으로 드리고 있지만 추수감사주일은 특별히 한 해, 한 해를 인도해 주시는 것에 특별한 날을 정하여 모든 성도가 한 마음으로 감사를 드리는 절기입니다. “나는 올 해 특별히 감사할 거리가 없다”고 생각하시는 분이 있다면, 아래 글을 읽어 보시기 바랍니다.

지금 당신의 집에 전기가 들어온다면 세상에 전기의 혜택을 받지 못하는 20억이 넘는 사람들보다, 집에 수돗물이 나온다면 아무 물이나 마시는 10억이 넘는 사람보다 감사할 이유가 있는 사람입니다. 하루 1불 이상으로 살고 있다면 1불 이하로 살아가는 12억명의 사람보다, 하루 한 끼라도 따듯한 음식을 먹을 수 있다면 8억 명의 영양실조로 고통 받는 사람보다 감사할 이유가 있습니다. 오늘 아침에 일어났을 때 당신의 몸이 건강하다면 이번 주를 넘기지 못할 1백만 명의 환자보다, 한 번도 전쟁의 위험이나 수용소의 외로움, 고문, 굶주림의 쓰라림을 겪지 않았다면 5억 명보다, 체포, 협박, 학대, 고문, 그리고 죽음의 두려움 없이 교회에 나왔다면 세상의 30억 명보다, 냉장고에 음식이 있고, 당신의 몸에 옷이 걸쳐져 있거나, 잠을 잘 수 있는 집이 있다면 세계 인구의 75%보다 감사할 조건이 많은 사람입니다. 더욱이 부모님이 살아 계시고 지금 혼자가 아니라면 보기 드물게 감사할 사람입니다. 지금 이 글을 읽으면서 당신이 축복받은 존재라는 사실을 깨닫는다면 세상에 글을 읽을 줄 모르는 20억의 사람들보다 더 감사할 이유가 있는 것이다.

위의 글을 읽으면서도 스스로 감사의 조건을 찾지 못한다면 그런 삶은 문제가 많은 삶이라 생각됩니다. 밴쿠버 이민생활이 결코 녹녹치만은 않지만, 아무리 이민생활이 어렵다 해도 위에 적힌 사람들보다는 우리의 환경이 훨씬 낫다고 봅니다. 누누이 말씀드리지만 감사하는 여부는 주변 환경에 달린 것이 아니고, 마음 자세에 달려 있습니다. 인간이 만족하며 산다는 것은 한도 끝도 없는 것입니다. 밑 빠진 독에 물 붓기 아니겠습니까? 아무리 떼부자로 산다고 한들 진정 감사함으로 사는 가정이 얼마나 된다고 생각하십니까? 부자면 부자일수록 수심이 가득한 가정들을 많이 보게 됩니다. 어느 정도 있어야 걱정없이 감사하며 살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하십니까? 감사는 뭐가 있고, 없어서의 문제가 아니라 신앙적인 영적인 문제라고 봅니다. 하나님 한분의 은혜로 감사하며 살 수 있다면 그것이 축복이 아닌가 싶습니다.

0.3초의 기적, 감사의 힘(Thank You Power)이란 책을 인터넷에서 접했습니다. 저자 스스로 감사의 힘에 대해 매우 냉소적이고 회의적이었다고 하는데 일상 속에서 감사하는 습관을 갖게 되자 자신도 모르게 좋은 일이 계속 생겨났다고 합니다. 거짓말은 아닐 것이라 믿음이 갑니다. 우리 삶 속에 감사라는 개념은 깊이 뿌리박혀 있으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를 간과하거나 잊고 지낸다는 것입니다. 하루를 살아가며 감사할 일이 최소 3개도 생각나지 않는다면 이는 본인의 사고방식이 부정적인 패턴에 익숙해져서 그렇다고 합니다. 이 책은 고마워요 당신에게/세상에게/나에게 등 3 파트로 구성되어 있는데 가장 중요한 포인트는 감사의 힘은 본인 스스로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에게 쉽고 빠르게 전파되어진다는 것입니다. 나 자신뿐만 아니라 주변인들도 행복해질 수 있다니 이 얼마나 대단한 힘입니까? 그래서 성경에서도 누차 “감사하라”고 말씀하고 있다고 믿습니다.

다음 주(10/9) 추수감사주일에는 목장별로 감사 찬양제로 드립니다. 한 해 함께 해 주신 주님께 감사하는 마음으로 목장별로 감사 이벤트를 준비해 주셨으면 합니다. 꽁트나 감사글, 아니면 찬양과 함께 각 목원들 가정에 감사했던 일들을 소개해 주시면 되겠습니다.글을 읽어 보시기 바랍니다.